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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과 울산김씨 - 정복규 본사사장
2010년 05월 31일 [익산신문]
인촌 김성수는 구한말로부터 6.25전후까지 우리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암울했던 65년간의 세월을 살다간 민족의 선각자로 살다 갔다. 그는 울산김씨의 후손이다.
인촌은 1891년 10월11일(음9월9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김경중의 4남으로 태어나 세살 때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출계했다. 조선 인종 때의 거유(巨儒) 하서 김인후의 13대 손이다.
6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8년 일본 경성으로 건너가 1914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1919년 10월에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0년 4월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함으로써 30세에 교육, 산업, 언론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과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함으로써 숙원이었던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꿈을 이룩하였으며 해방 후 1946년8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하여 고려대학교를 발족시킴으로써 민족사학의 터전을 다졌다.
해방 후 애국지사들이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참여를 권해 왔으나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1945년12월 고하 송진우 선생이 흉탄에 쓰러지자 주위의 강청에 못이겨 한민당 수석총무(당수)를 맡았다. 1951년5월 피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부통령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뜻을 같이 할 수 없어 1년만에 사임하고 말았다.
1953년 환도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이승만 독재에 대항할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다 1955년 2월18일 6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장지는 고려대학교 구내 인촌동산이었다.
한편 울산김씨의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이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하려 할 때 극력 말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의태자(경순왕의 첫째 아들 김일)를 따라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의 14세손인 김환(金環)이 고려 때 벼슬이 삼중대광 영도첨의사에 이르고 학성(울산)군에 봉해짐으로서 그의 후손들이 김환을 중시조로 하고 본관을 울산으로 하였다.
울산김씨는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11,270 가구에 36,225 명으로 드러났다. 집성촌은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리, 전남 장성군 서삼면 금계리. 장산리, 북일면 성산리, 북이면 산평리, 진원면 일원, 황룡면 맥호리, 경남 울주군 강동면 정자리, 함경남도 문천군 천내읍 일원 등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중종 5)~1560(명종 15))도 울산김씨를 빛낸 인물이다. 그는 조선 중기 문신·유학자로 유명하다. 하서는 해동18현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참봉 김영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다. 10세 때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성균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에서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노수신,·기대승,·정지운, 이항 등과 사귀었다.
제자로는 정철,·변성온,·기효간, 조희문,·오건 등이 있다.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올랐다.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에 이르렀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주자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 뒤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8~1964)도 울김 후손이다. 순창 출신인 그는 1913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191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916년 경성법학전문학교 조교수, 1917년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거친 다음, 1919년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이 기간 중 조선변호사협회 회장과 조선인변호사회장을 역임하면서 왕성한 법정투쟁을 하였다.
3·1운동 사건을 비롯하여 단천사건, 간도사건, 정의부사건, 광복단사건, 105인사건, 흥사단사건, 안창호사건 등 매년 100여 건에 달하는 변론으로 독립투사 구출에 진력하였다.
익산신문 기자  iksan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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