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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이리농림 다닌 98세 김성호 옹
1943년 수의축산과 졸업해 익산지역 최고령
재학중 한하운 시인-임대홍 전 회장 등 인연
조선팔도 수재들 모인 입학시험 또렷이 기억
일본 수학여행-운동장서 스모 연습 많이 해
개교 100주년 행사는 익산시민 함께 했으면
마스터 기자 / iksanpress@hanmail.net입력 : 2020년 03월 09일(월)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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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이리농림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5년간 수의축산과를 다닌 김성호 옹이 재학중의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 익산신문
1923년생.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여덟이다. 꼿꼿한 자세에 눈과 귀도 밝고 말에서도 힘이 느껴진다. ‘노당익장(老當益壯)’은 과연 이런 분에게 어울리는 말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익산시 마동 시영아파트에 거주하는 김성호 옹을 알게 된 것은 이리농림 총동창회 사무실을 방문해서였다.

동창회 사무를 맡고 있는 상근자에게 최고령 졸업생을 파악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작년까지 자전거를 타고 사무실에 오시던 분이 계신데 올해는 오시지 않는다고 했다.

연락처를 물어 전화를 드렸더니 다행히도(?) 받는다. 지금 북부시장에 있으니 당장은 만나기 힘들고 다음 날 동창회 사무실에서 만나자는 답변이 돌아왔다. ‘백수(白壽)’의 노장이 시장 나들이라니….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여전한 3월5일 오전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 내 이리농림총동창회 사무실에서 김성호 옹을 만났다. 온화한 미소로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기자)날도 추운데 어떻게 오셨나요?

△(김성호 옹)춥기는 뭐…, 걸어왔어요. 시내에 볼일도 있고 해서.

-걸어 다니시는가요?

△매일 걸어요. 어제도 걸어서 북부시장에 다녀왔고. 아직까지 큰 병 없이 이렇게 다니는 것이 매일 걷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자리에 앉아서 인터뷰를 하게 된 취지를 설명하고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이리농림 다니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내가 1943년에 졸업을 했어요. 수의축산과. 입학시험을 1938년인가 치렀는데 그 때 시험을 보려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나는 여기서 못보고 저기 일출소학교(지금의 이리초등학교)에서 봤지. 조선 팔도에서 다 오고 일본에서도 시험보러 여기까지 왔었으니까 대단했지.

-경쟁률이 꽤 높았던 모양이지요.

△그 때 한 과에 50명씩. 세 개과(수의축산과, 농과, 임과)를 뽑는데 조선사람 절반, 일본사람 절반을 뽑아요. 그런데 일본사람은 거의 일 대 일이야. 그런데 조선사람은 한 열 배는 모인 것 같아. 50명 뽑으면 500명, 1000명이 몰린단 말이야. 더구나 당시에 소학교에서 아무나 이리농림에 원서를 안 써줘요. 학교에서 1~2등은 해야 원서를 써 준다고. 그러니 조선 팔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수재들이 시험을 보러 몰렸을 것 아니에요. 아유~, 대단했어요. 그때. 듣기로는 우리가 입학시험을 학교에 와서 본 첫 기수라고 합디다. 그 전에는 팔도 도청에 의뢰해서 시험을 친 다음에 합격한 사람들이 입학을 했다고 들었거든. 그렇게 해서 입학을 했지.

↑↑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이리농림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5년간 수의축산과를 다닌 김성호 옹이 기념관 부조에서 임대홍 미원그룹 창업주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 익산신문
-원래 고향이 이리였나요.

△난 정읍 칠보사람이에요. 우리 선대는 원래 신태인에 사셨는데 임진왜란 난리 속에 산골로 피해 칠보로 들어왔다고 들었어요. 아버지는 근방에서 꽤 땅이 많은 지주셨어요. 아버지 논이 지금 정읍 북면에 많았던 모양인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가을 추수를 마치면 가서 도작료를 돈으로 받아오셨어요. 그래서 돈 다발을 내 앞에 펴 보이며 자랑스러워하셨던 기억이 나요. 집은 넉넉한 편이었어요.

-이리농림의 학생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기본적으로 돈 쓸데가 많은 학교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집 자제들은 입학을 못했어요.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 했던 친구들은 사범학교로 진학을 하고 부잣집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이리농림에 많이 왔죠. 실습비다 피복비다, 들어갈 돈이 많았어요. 또 당시 학교 안에 구판장이 있어서 기숙사에서 살면서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수시로 구판장으로 몰려가 이것저것 군것질을 많이 했지요. 빵도 사먹고 사탕에 과자도 있고 과일도 살 수 있었으니까.

-학교 다니실 때 이야기 더 들려주세요.

△학생들이 참, 저 북쪽 회령, 경성(이상 함경북도) 이런 데서도 오고, 평안도, 강원도, 경상도에서도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왔어요. 그 때 전교생이 한 750명 되는데 기숙사에 250명 정도가 살았거든. 그때 기숙사에 나랑 방을 같이 썼던 사람이 한하운이야. 시인. 근데 우리 동급생들이 뭐라고 하냐면 ‘저 미친놈’이라고 그래. 시 짓는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고, 하여간 특이했었어. 근데 나중에 보니까 진짜 유명한 시인이 됐잖아.

↑↑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이리농림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5년간 수의축산과를 다닌 김성호 옹이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 익산신문
또 미원그룹 임대홍 회장 있잖아. 그 분도 정읍이거든. 나보다 3년 선배야. 임대홍 회장이랑 한하운 시인이. 그런 분들이랑 같이 다녔어. 또 기억에 남는 것은 김용택 선배라고(일부 기록에서는 김택룡으로 전해진다. 어떤 이름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다) 스모를 아주 잘했던 사람이에요. 김용택이 조선에서 1등을 해서 일본 대회에 갔는데 결승전에서 홋카이도 출신 일본선수와 붙어 우승을 했어요. 그때 아주 축하하느라 이리시내가 난리가 났어요. 당시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스모를 많이 했지요. 교문 들어서면 스모장이 있어서 너나없이 스모를 했으니까요. 당시 일본에서도 조선의 목포상업이랑 이리농림 스모를 알아줬대요.

실제로 이리농림학교는 1936년 18회 전국스모대회와 1938년 20회 전국대회에서 각각 단체전 3위를 차지했으며, 1941년 규슈(九州) 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김용택(또는 김택룡)이 큰 역할을 했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일본인 동급생들도 있었지요? 그들과는 사이가 어땠나요.

△그 때는…, 별 차이를 못 느꼈지.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하지만 걔들(일본인 학생)도 이리에서 나고 자란 애들이라 우리말을 잘 했다고. 일본말도 잘하고. 얌전한 애들도 있고 운동을 잘하는 애들도 있고, 다 같았어.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애는 세키미치오(關道生)이라고, 그 친구가 일본사람들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어요. 그래봐야 조선 사람보다는 못했지만. 나중에 일본인 친구들 여럿이 1970년대 중반에 익산에 왔더라고. 그래서 내가 모두 먹이고 재우고 학교도 둘러보고 했어. 그 뒤로는 서로 오가지 못했지 뭐. 작년인가 아들이랑 일본 동창생들 만나려고 준비까지 했는데 결국 못갔어.

-당시 교사나 그 밖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당시에 이리농림은 5학년 때 수학여행을 일본으로 갔어요. 2주간 일정으로 부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 내린 뒤에 규슈로 가서 아소화산도 보고 온천도 하고 기차를 타고 도쿄 궁성을 찾아가는 코스에요. 일왕이 살고 있는 곳 앞에까지 가서 다리는 못 건너고 광장에서 ‘덴노 헤이카’를 참배하고 오는 것이지요. 그 때는 참, 그랬어요.

↑↑ 김성호선생이 이리농림에 재학중일때 5년동안 담임을 맡았던 오미네(大峰)선생(왼쪽에서 두번째)은 당시 전북도지사로 부임한 김대우(金大羽)와 규슈제국대학 동기생이었다고 한다.
ⓒ 익산신문
또 우리 때는 5년간 한 분이 담임을 맡는데 오미네(大峰)선생이었어요. 담임이. 이 분이 규슈제국대학을 나왔거든. 근데 그 당시 전북도지사가 김대우(金大羽)씨라고 하는 분인데 오미네 선생과 대학 동기였나봐. 도지사가 초도순시하러 온다니까 자존심이 상했는지 안 봤으면 하더라고 . 근데 막상 학교에 오니까 깍듯하게 인사를 하더라고. 그때 좀 놀랐어. 내가 학교 다닐 때 진주만 폭격(1941년)도 있었고 남양군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많은 일들이 있었지.

-징집은 안 당하셨나요.

△졸업을 하니까, 그 때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갔어요. 난 정읍군청 축산계로 갔지요. 갔는데 1945년 2월에 징집이 된거야. 나는 용산에 있는 23부대에 배속됐어요. 말 관리하는 중대야.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말 발을 닦아주고 씻기고 아침을 먹인 뒤에 우리 밥 먹고 그랬다고. 우리 중대에 거의 일본사람들이고 조선인은 나랑 광주사범, 남원농림 나온 사람 셋 뿐이었어요.

그러다 일본이 패전하고 우리가 광복을 맞았잖아요. 그런데 일본 사람이 날더러 ‘전쟁도 끝났는데 말을 뭐 하러 관리하냐. 그냥 밥이나 먹이지.’라고 하는 거에요. 난 ‘말이 무슨 죄냐’고 맞서다가 싸움이 크게 났지요. 중대장이 그것을 듣고 우리 둘을 부르더라고. 가서 그대로 이야기 했지. 갑자기 중대장이 가죽 허리띠를 풀더니 그 일본인 병사를 후려치는 거야. 내 말이 맞다면서. 그러면서 나더러 넌 조선이 독립하면 군대가 생길테니 장교가 되라는 거야. 그땐 내가 돌아갈 직장이 있었잖아. 그래서 안 했는데, 나중엔 후회가 되더라고. 그때 사관학교에 갔으면 나중에 어떻게 됐을까 하면서.

↑↑ 가네무라야스오(金村泰男-한국명 김병태) 전북도지사가 1940년대 초반 이리농림학교를 초도순시한 가운데 학생들이 도열해 있다.
ⓒ 익산신문
-8.15광복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일본군대가 해산되고 바로 정읍으로 왔어요. 정읍군청에 복직하고 그 뒤로 고창군, 장수군 여러 곳으로 전근 다니면서 우리 지역 축산관련 업무를 많이 했지요. 축산위생시험소가 처음 생길 때는 시험소 부지를 닦고 관사 짓고 하는 자질구레한 모든 일을 다 했어요. 나중에 도청 종축장장을 하고 정년을 했어요. 형제는 내가 맏이고 남동생 둘, 여동생 셋인데 셋은 먼저 가고 셋은 남았어요. 자식은 2남2녀인데 큰아들, 큰딸은 서울에 살고 작은아들과 작은딸이 익산에 살고 있어요. 건강관리는 그저 걷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자주 걸어요.

-끝으로 더 하실 말씀이 있다면.

△시간이 많이 흐르고 지인들도 많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지요. 곧 있으면 이리농림학교 100주년이 되는데 동문들뿐만 아니라 익산시민과 전북도민의 잔치가 되었으면 해요. 동문들도 서로 협조하고.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시니 고맙습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대담·정리=김대홍 기자






마스터 기자  iksan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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